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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각하 탄신 제100주년 기념우표 준비, 한강기적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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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대통령 각하 탄생 제 100 주년 기념우표 개요 . 1. 제목 : 1 만년 한민족의 역사와 國父 ( 국부 , The Founding Father) 이승만박사께서 건국하신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배출한 세계사적 위인과 영웅으로 위대한 대한민국의 國富 ( 국부 , The National Wealth) 박정희대통령각하 탄신 제 100 주년 기념 우표 . 2.  주제  :  한강 기적  “ 우리는 또 다시 해야 한다 ,  할 수 있다 ,  하면 된다 !” 3.  기념우표로 만들  16 장 사진 선정 기준  :  박정희대통령 각하의  5.16 혁명의 민족사적 의의와 한강 기저의 세계사적 위대성을 증거할 수 있는 업적을 증거할 수 있는 팩트 사진 . 4.  사진 설명 ,  사진 번호  ( ) 은 업적 분야와 선정의 이유와 의미 . 1) 사진 ( 지도자 부상 ) : 1955 년 11 월 3 일 인제 관대리 ,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키운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자 애국애족의 최고 군인엘리트 동양의 나폴레옹 박정희장군 ( 준장 , 제 5 사단장 ) 과 국부 이승만박사의 만남 . 제 3 군단 ( 군단장 송요찬중장 ,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대동 ) 을 방문하여 예하 부대 방문 시 자신이 사면과 유학을 시켜 준 제 5 사단장 박정희준장을 만나 악수하는 모습 .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대장은 제 5 사단장 박정희준장보다 일주일이 늦은 동갑이었고 ,  제 3 군단장 송요찬중장은 박정희준장보다  1 년 후배였으며 ,  제 1 군 사령관 백선엽대장은  3 년 후배였고 ( 박정희소령을 수사했던 김창룡중령은 당시 소장으로 백선엽장군과 동갑 ,  사후 중장 추서 ),  제 9 사단 재 창설식 때 사단장으로 준장이었던 참모차장 장도영중장은  6 년이나 후배였습니다 .  즉 당시 모든 군인 엘리트들이 박정희준장의 후배였던 것입니다 .  군인 박정희는 해방 후  15 년 동안 수 많은 시련과 고통과 수치와 수모를 박근혜대통령께서 최근에 독서하신다는  大望 ( 대망

박근혜대통령은 단순히 탄핵내란세력과 투쟁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왜곡과 북진멸공자유평화통일을 위한 최후전쟁을 하시는 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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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 각하 탄생 제 100 주년 기념우표 개요와 설명서 . 1. 제목 : 國父 ( 국부 , The Founding Father) 이승만박사와 함께 1 만년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배출한 세계사적 위인과 영웅으로 위대한 대한민국의 國富 ( 국부 , The National Wealth) 이신 박정희대통령각하 탄신 제 100 주년 기념 우표 . 2.  주제  :  한강의 기적  “ 우리는 또 다시 해야 한다 ,  할 수 있다 ,  하면 된다 !” 3.  우표로 만들  16 장 사진 선정 기준  :  박정희대통령 각하의 세계사적 위대성과  5.16 혁명의 민족사적 의의를 쉽고 잘 증거할 수 있는 팩트 사진 . 4.  사진 설명 사진  1 :  대구사범학교 입학 직전 소년 시절의 박정희 ,  1917 년  11 월  14 일 생으로 일제의 가장 악랄한 억압통치시기 구미 상모동 시골의 가난 가정의 늦동이로 임신하여 여러 번 낙태의 위기를 견디고 출생했습니다 .  이렇듯 악랄한 통치에 투쟁하여 일어난 비폭력 저항운동이 바로  1919 년 삼일운동이었습니다 . 1932 년  15 세 나이에 박정희소년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1932-37 년  5 년 재학 ).                                               사진  2 : 1937 년 대구사법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향을 방문하여 모친 백남의여사와 함께 . 일제 식민지 당시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청소년들과 청년들 중에 최고 민족주의적 엘리트들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친일이라는 굴레를 최대한 벗어버리기 위해 입학하는 곳이 바로 각 지역의 주요 도시에 있는  “ 사범학교 ” 였습니다 .  태어나면서부터 국적이 일본인이지만 가정에서부터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긍지를 배우고 자란 자녀들은 당대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만일 당대 최고 엘리트로서 경성제국대학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