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은 망각과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왜곡과 싸우고 거짓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 역사 왜곡이 최악의 죄악인 이유는 청년들 청소년들 어린이들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파괴된 영혼은 국제경쟁력을 상실하고,
개인의 미래는 물론 가문과 교회와 국가의 미래가 암울해지고,
결국 인류의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거짓 왜곡 역사에 미혹 선동 세뇌가 되면 진실(사실)을 제시해도 거부하고,
자신의 어릭석음을 인정하기 싫어하여 오히려 분노하며 흥분하는 반응이 더 불행하다.
북진자유(흡수)평화통일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역사의 과정이며, 그 흐름과 대세와 시세를 막을 수 없다!
이승만청년은 배재학당에서 약 2년6개월 College 과정을 공부한 것을 인정받고,
이미 동양학(한문, 한학 등)에 정통하여 죠지 워싱턴대학교에 3학년에 편입하였고,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구열이 뜨거웠던 배재학당 시절 이승만청년에 강한 영향을 미친 분 감리교 의료선교사 Harvard대학교 출신의 John Busted였습니다.
1893-1897년 동안 헌신적인 사역으로 병을 얻어 귀국했다가
1901년에 소천한 불꽃과 같이 젊음을 불태운 하버드출신의 버스티드선교사는 이승만청년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진 1 : Harvard출신으로 유일하게 조선에서 활약한 J. Busteed.
사진 2 : 1897년 감리교 선교사들 사진, 맨 왼쪽 J. Busteed.
약 4년 동안 머리가 많이 빠지고, 마친 송별 기념 사진 같습니다.
이승만청년은 죠지 워싱턴대학을 졸업하자 과감하게 하버드대학교에 편지를 썼습니다.
“점점 일본제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한민족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해야 하니
1년 만에 박사학위를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문의했습니다.
하버드 당국은 “우리 대학 역사 상 그런 경우는 없으니 일단 입학해서 석사학위부터 하라!”는 답신을 받고 일단 입학을 했습니다.
1년 만에 학위를 받으려고 무리하게 여러 과목을 수강했지만 경제학에서 점수가 부족하여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박사학위을 하루 속히 마치고,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마음이 조급한 이승만청년에게 하버드대학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사진 : 하버드 재학 당시(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에서 계절학기에 경제과목을 이수하고 석사학위를 받음, 역사상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석사학위를 받은 유일한 경우).
사진 3,4 : 하버드재학 시절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는 프리스턴대학 출신의 장로교 조선사 Ernest F Hall선교사가 마친 안식년으로 미국에 와서 발벗고 나섰습니다.
이승만청년에게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을 주선해 주고, 대학원장과 총장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사진 5 : E.F. Hall선교사 묘지
이승만청년은 당당하게 학교측에 똑같은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 아주 정중하고 우호적인 답신이 왔습니다.
“우리 학교 역사 상 그런 적이 없지만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청년은 1년만에 하버드 석사과정을 바쳤지만 석사학위도 없이 곧바로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을 한 것입니다.
사진 6 :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는 시절, 틈틈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신학생들과도 교류
보스턴에서 뉴저지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드로 윌슨총장은 총명한 이승만청년을 총장 공관과 가까운 기숙사에 배정하여 종종 함께 지재는 특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사진 7 : 이승만 신학대학원 기숙사,
종종 윌슨총장과 그의 둘째 딸 Jessie Wilson과 테니스를 쳤던 라켓도 보임.
사진 8 : 윌슨총장 댁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승만청년과 사랑에 빠진 윌슨총장의 딸 Jessie Wilson양
많은 장학금과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신학대학원에 소속하여 신학 공부도 하심.
이제 이승만청년은 매 주일마다 뉴저지와 근처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장로교회를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11월 1일 E.F. Hall선교사와 프린스턴 졸업생 3명과 함께 필라델피아 Bethany장로교회를 방문하여 한국 선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는 설교와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다니장로교회는 미국 전역에서 제일 유명한 장로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 백화점 왕이라는 John Wanamaker장로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통해 기독교신앙을 잘 배워 설립한 교회가 바로 Bethany Presbyterian Church였습니다.
특별히 베다니장로교회의 교회학교 건물은 본당보다 더 큰 건물을 따로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교회학교 교회건물을 일명 Great Sunday School이라고 합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한 체신부장관을 마치고(Harris대통령 정부),
계속 이 교회학교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71세의 워너메이커장로님은 자신이 후원하던 조선의 장로교 선교사로부터
1909년 1월 7일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일본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을 소개받고 만났습니다.
워너메이커장로는 이 청년을 자신의 교회에 초청하여 자신이 가르치는 교회학교 어린들에게 위대한 선교의 열매이며,
“Born Again(중생, 거듭남) 신앙인의 한 모델”로 이 청년을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청년은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감옥 체험과 신앙을 간증합니다.
사진 9 : 1899년 2월 22일(수)경 한성(종로)감옥의 이승만청년에게 영어성경을 선물로 준 예일대 출신의 인도선교사 Sherwood Eddy.
사진 10,11 : 간증할 때 자신의 감옥사진을 환등기로 보여주며 시청강의를 했습니다.
이승만청년은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사진 12),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식민지가 된 자신의 민족에게로 돌아가서(나라가 합병되어 없어졌으니 귀국이 아님)
신변보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국제단체인 YMCA 총무의 직함을 가지고 조선 엘리트청년 선교와 국민계몽운동을 합니다.
워너메이커장로는 자신의 마지막 선교사업이며, 구제사업으로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고통을 당하는 한반도의 한민족을 위해 자신이 후원는 독립운동가 이승만박사의 활동을 돕기 위해 경성 YMCA를 건립하는데 헌신합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박사를 돕는 것이 한민족을 돕는 것이며,
한민족을 돕는 것은 곧 독립운동가 이승만박사를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워너메이커장로님과 같은 미국 기독교계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사회계 여성계 법조계 학계의 최고 인물들이 계속해서 이승만박사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1945년부터는 이승만박사의 건국활동을 도왔고,
1948년부터는 신생국 대한민국을 도왔습니다.
사진 13,14,15,15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보도하는 NY Times
사진 17 : 건국식 때 국부 이승만박사와 맥아더사령관 사진으로 만든 LIFE 지의 카드.
1950년 6.25동란이 당하자 호국을 위해 더욱 헌신적으로 돕게 됩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온갖 구호물자와 복구자금을 지원합니다.
위대한 한 청년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이며,
동북아시아 조선의 가난한 한 청년을 키운 위대한 미국의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곧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를 왜곡 부정 거짓으로 선동하여 세뇌를 당한 대한민국 청년 청소년 어린이들을 깨워야 합니다.
사진 18 : 오늘날 베다니 장로교회
사진 19 : 이승만청년이 방문하고,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장로님이 봉사했던 당시 Bethany Presbyterian Church
사진 20 : Wanamaker장로님이 이승만청년을 소개했던 Bethany Presbyterian Church 교회학교 건물(본당 옆에 있는데 본당 보다 더 큽니다).
사진 21 : 교회학교 건물 내부,
워너메이커장로님은 "Great Sunday School"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사진 22 :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설교하시는 워너메이커장로님,
여기서 이승만청년을 소개하고 간증함.
사진 23 : 자유 개척정신 정직 성실 열심 봉사 헌신 교육 등 미국의 기독교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 워너메이커장로(Men of America).
사진 24 : 워너메이커 백화점, 워너메이커 빌딩.
사진 25,26 : 필라델피아 시청과 옆에 있는 백화점
사진 27 : 동상
사진 28 : 명언
사진 29 : 1910년 10월 10일 서울 도착, 10월 23일(주) 이승만박사 환영 기념촬영. 이상재선쟁과 배재학당 친구 이경직목사(중로교회 담임, 현 중앙교회)
사진 30 : 1910년 11월 YMCA에 도착하자 이승만박사를 보기 위해 몰려든 경성의 엘리트 청년들, 옆에 질레트총무.
사진 31 : 1911년 YMCA 학감 이승만박사.
사진 32 : 워너메이커장로님이 건축하시고, 이승만박사가 총무로 봉사하던 당시의 종로 황성YMCA(1910년 사진).
사진 33 : 일제 말기 한성전기와 YMCA.
이승만박사의 전국적인 왕성한 활동으로 조선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깨우자 일본제국은 이승만제거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제국은 이승만박사를 체포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으나 감리교 선교사들이 감리교 세계총회 조선감리교 대표로 이승만박사를 임명하여 친일파 일본감독인 Harrison목사와 동행을 시켜 안전하게 출국시켰습니다.
사진 34 : 1912년 3월 9일(토) 이승만박사를 조선대표선출하여 출국시키기 위해 모인 감리교 총회.
사진 35 : 1912년 3월 24일(주) 송별회 이상재선생 이경직목사 등과 함께. 자신의 생일 26일(화) 또다시 조국 떠나 미국으로 출국.
이 당시 일본제국의 박해를 두려워하는 조선의 감리교회들 중에 감히 나서서 이승만박사의 교회 소속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이경직목사가 종로감리교회(현재 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 정의선)에 소속시켜 조선감리교대표자로 선출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역사입니다.
페친께서 미국으로 간 이승만박사가 1년 6개월 동안 조국의 YMCA에서 활동한 보고가 Washington Post지에 실린 것을 알려주셨습니다(사진 36 : 1912년 11월 기사)
* 변화도상의 한국
"오래된 은자의 왕국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한국출신의 이승만 박사가 이렇게 선언했다.
그는 YMCA에서 온 워싱턴 방문자다.
"3년이라는 기간 내에 전통에 지배당하던 한국은 느리게 변하는 시골에서 생생하고 북적대는 공업화의 중심지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라고 이박사가 말했다.
"전기차노선이 나라의 여러 지역을 교차합니다 :
도시들은 전기불이 들어오고요 ;
방앗간, 공장 그리고 백화점이 여기저기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서울은 씬시네티와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단지 주민들의 용모만 다르죠.
워싱턴의 공방에서 만들어지는 찻잔에 새겨진 옛날 한국이 지금 여행객들이 보는 현대적이고 분주한 산업화된 한국으로 변화된 것은 상상도 못할 빠른 변화입니다."
" 이러한 모든 변화의 과업에서 YMCA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In all this work of transformation, YMCA has had a most important part.
서울에 있는 우리 회관 건물을 예로 들어보죠,
참, 그 건물은 미국인 존 워너메이커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서울 YMCA는 제가 간부로 있는데요,
서구의 산업화의 가치를 한국인에게 홍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임금노동자를 데려다가 일자리를 고르게 합니다.
가구제작, 목공, 낙하단조성형, 캐스팅, 몰딩, 대장간질, 건축도안, 제도작업 등의 다양한 직업 중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요.
"거기다가, 좀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에겐 서양식 단과대학 입학 기회를 줍니다(연희전문학교, 숭실학교 등 의미).
모든 고등학교의 분과와 유럽의 언어와 영어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한국의 부유층에게 20세기의 사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자기 땅에다 농사에 전념하는 것 대신에요 ;
그리고 우리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 한국이 자기 힘으로 서울 YMCA 비용을 대고 있는 것입니다.
회관 건물 짓는 비용뿐 아니라 70명의 한국인 간부들의 월급까지도 지불하고 있습니다."
서울 YMCA는 지금 1,500에서 2,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은자의 왕국에서 기독교의 활보는 신비로울 정도입니다.
고작 27년 전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이제 325,000명의 신자가 있고 개종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박사는 그 자신의 기독교 개종을 15년 전 그의 급진적인 개화운동 참여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혁명 시도의 결과로 그는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7년간(1898년 말 수배로 부터 1904년 석방 때까지 햇수로 기록, 게일선교사는 6년으로 표기하기도)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그가 성경말씀을 동료들에게 읽어 줌으로 그 자신과 50명의 청취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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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김영삼정부 때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역사왜곡이 시작되어 10년 종북좌파 정권 동안에 젊은이들의 정신을 다 죽여 버린 Healing 개념!
이제 위대한 대한민국의 청년들이여!
공부하고 기도하며, 북진자유(흡수)평화통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역사왜곡을 돌파(Break out)하라!
무엇보다 한국교회 청년부 교회학교에서 통일비전과 민족복음화를 성취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샘솟듯 배출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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