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수 방훈화후보 공약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괴 김일성일단의 기습남침 6.25동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6.25동란은 1만년 한민족사와 대한민국 현대사에 최고의 영웅을 배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기적을 일으키며,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체제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압도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되는 영웅을 탄생시킨 전쟁이었습니다.
세계사적 천재이며 지도자이신 국부 이승만박사는 "인재" 발견, 양육, 배출만이 한민족의 살 길임을 일찍부터 깨달으시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위기상황에 오히려 탁월한 인재들을 발견해 내고 키웠습니다.
자기 자신도 구한말 세계 열강에 짓밟히고 결국 일본제국의 식민으로 전락하는 비극의 시대에 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인재로 키워져 독립운동을 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대한제국 개혁운동을 하다가
1900년 1월 9일 고종황제의 미움을 받아 극형(사형)을 받아야 하는 대역(반역)죄로 엮여(박근혜대통령을 탄핵으로 엮은 세력의 원조, 조병식대감 등) 서소문감옥에 갇혔습니다.
아펜젤러 등 배재학당에서부터 이승만청년을 키운 선교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구명운동을 하고, 모함으로 엮였기 때문에 무죄 방면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이승만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르고, 범털 개혁가 최정식과 개털 뇌물죄 서상대의 꾀임에 넘어가
1월 30일 총기를 휴대하고 탈출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또다시 구명활동을 하여 "대명률(大明律) 포망편(捕亡編) 죄인거포조(罪人拒捕條) 위종자률(爲從者律)에 의해 태 100에 징역종신형을 선고"받게 했습니다.
즉 대역죄는 면했으나 총기를 휴대하였지만 사용하지 않아 요즈음 용어로 "탈주 체포불응죄"를 적용하여 무기징역과 태형 100대만을 선고받게 한 것입니다. 무기형은 언제든지 사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태형을 맞지않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청년은 비로소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배재학당 채플에서 하셨던 설교를 기억해내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중생(거듭남)나게 됩니다.

사진 : 1900년 2월 22일 미국의 국부 죠지 워싱턴 생일을 맞이하여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청년이 회심을 했다는 소식들을 듣고 기뻐하며, 미국의 독립기념행사를 가지면서 미국 독립과 건국의 중요한 국부들(Founding Fathers)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죠지 워싱턴장군의 복장을 하신 아펜젤러선교사,
첫번째가 미국과 같은 국가 건국 비전을 심어주고 교육한 존스선교사,
왼쪽에서 첫번째가 이승만이 처음 만나 영어를 배우게 된 화학교사 노블선교사,
두번째가 국기(태극기)와 국가(애국가) 등의 개념을 가르쳐주신 벙커선교사.
이들은 이승만청년의 평생 스승이며, 독립운동을 도운 4명의 감리교 선교사들로 그들의 비전은 "이승만청년"을 아시아 최초로 미국과 같은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한반도의 국부 죠지 워싱턴과 같은 인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5년 8개월 동안 무기징역으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선교사들이 1904년 8월 9일 출옥시켜 고종황제의 특사와 유학으로 미국에 가게 했습니다.

사진 : 에비슨선교사(제중원, 세브란스병원 원장)가 출옥한 이승만을 마중하는 장면
이러한 체험이 있는 국부 이승만박사는 1948년 10월 숙군작업 때에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로 체포되어 즉결처분(총살형)을 받게 된 박정희소령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진 : 형 공산주의자 박상희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육사 교관 박정희대위를 남로당 군사부총책 이재복목사(종북좌파목사의 원조)가 유혹하여 남로당에 가입시켰습니다(육군사관학교 교관 때 모습).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당시 백선엽특부대장의 조사 보고서와 김정렬공군참모총장 등의 건의를 듣고,
아무런 혐의가 없지만 남로당에 가입한 고위직 장교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 "인재를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 살려야 한다"고 군법재판에 회부시켰습니다.
1949년 2월 군법재판소에서는 일단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10년형으로 감형한 후에 강제예편시켰지만 문관으로 정보처에서 다시 근무할 수 있도록 선처했습니다.

사진 : 군법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박정희소령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소장 결재 서류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이 일어나자 즉각 소령으로 다시 군무에 복직을 시켜
1950년 7월초 전투정보과장에 임명을 받자 박정희소령은 이 때부터 탁월한 군인능력을 발휘하여 날개를 단 거룡으로 부활을 시작합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6일부터 부산에 엄청난 최첨단 군수물자가 쏟아져들어오고, 이것을 서울까지 안전하게 수송하는 아주 중요한 군수수송업무가 생겼습니다.

사진 : 50년 9월 16일(토) 부산항에 쏟아져 들어오는 군수물자
군수 원조 물자 관리와 수송을 위해서는
1)청렴결백해야 합니다.
군수와 원조물자에 손을 대면 강력한 처벌을 하는 법령을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사진 : 50년 9월 16일 극형에 처한다는 국부 이승만박사의 특별 명령
2)각종 군수물자분류, 철도 도로 운송장비 등을 잘 활용해야 하는 고도의 수송작전이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장교가 필요했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와 UN군 사령관 맥아더원수에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문관으로 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북괴 남침 루트까지 예상하고, 복직하여 전투정보과장 역할을 잘 감당한 무엇보다 청령결백하다고 선후배들의 신임을 받는 "박정희소령"이었습니다.
박정희소령은 이 업무를 탁월하게 감당하여 국부 이승만박사와 맥아더원수의 총애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월 30일에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고, 2계급 특진하여 곧바로 대령으로 진급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1961년 5월16일 혁명을 성공하고,
국부 이승만박사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의 유지를 실천할 청렴결백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 박정희의장의 생일날 11월 14일에 케네디대통령의 국빈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맥아더원수를 정확히10년 만에 다시 기쁘게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 1961년 11월 18일(금) 뉴욕 아스토리아호텔 맥아더 숙소 방문
국부 이승만박사와 친형제지간과 같은 동생 맥아더원수가 키운 34세 소령 장교가 자랑스런 44세 육군 대장의 성공한 혁명지도자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하야하시게 되는 1960년 1월에 국부께서 대한민국에 많은 유산과 유지를 남기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부산에 최초로 군수기지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초대 사령관에 박정희소장을 임명한 것입니다.
이 요직을 수많은 고급 장성들이 각종 로비와 인맥 등을 동원하여 노리고 있었지만 국부 이승만박사의 눈에 박힌 인재는 10년 전에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군수물자수송을 탁월하게 감당하고, 자신이 1953년 12월 준장으로 진급시켜 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장군으로(Fort Sill, 미 포병학교) 미국 유학까지 시킨 박정희장군밖에 없었습니다.
20개 정예사단을 완비한 대한민국 강국 육군의 엄청난 군수물자와 원조물자의 관리와 수송 업무를 감당한 최고의 엘리트 장성은 오직 박정희소장이었습니다.

사진 : 1960년 국부 이승만박사의 마지막 재임 활동이 된 이 때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셨는데,
하나는 1월 16일(월) 원자력연구소 방문과 1월 20일(수) 박정희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임명 결재입니다.

사진 : 초대 군수기지사령관 임명

사진 : 중장진급 직전 재건회의의장으로서 박정희소장 공식 존영

사진 : 1961년 8월 10일(수) 중장 진급
케네디대통령의 국빈방문이 성사되자 대장으로 진급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사진 : 1961년 11월 4일(금) 윤보선대통령과 송요찬내각수반이 대장 계급장 달아주는 모습

사진 : 군인 박정희의 훈장 수훈 명단, 맨 처음이 바로 군수물자수송업무 지휘로 충무무공훈장

사진 : 박정희대령이 수여 받을 당시의 제3등급인 충무무공훈장과 약장
육군 대령에 특진한 군인 박정희는 같은 교사 출신 육영수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6년 후배인 장도영은 이미 준장으로 사단장이며,
자신의 동기이며 친구이면서 출생이 10일이 늦은 정일권은 육군중장 참모총장인데,
만일 비전이 없는 만년 소령이었다면 명가의 자녀 육영수와 결혼을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와 맥아더원수의 총애를 받는 이 때부터 박정희는 군인의 은사를 마음껏 펼치면서 탁월한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육영수와의 결혼은 찬란한 대한민국 역사가 도약하는 전환점과 분기점과 같습니다.

사진 : 12월 12일 결혼식
대령에 진급하는 박정희는 제9사단 참모장으로 발령을 받아 중공군의 개입으로 곤란에 처한 최전방에 투입이 됩니다.

사진 : 신혼살림 때 모습
1950년 2월 강릉 경포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리자마다 정선으로 이사하여 5월까지 근무하게 됩니다.
정선은 장래가 촉망되는 탁월하고 진정한 대한민국 국군 고급장교와 행복하고 안정된 한 가정의 가장으로 거듭나며,
1년 후 1952년 2월 2일 장녀 박근혜영애가 태어나 아버지가 될 준비한 역사적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대한애국당 정선군수 방훈화후보의 공약이 바로 이 자리에 "박정희대통령 동상"을 건립하여 정선을 자랑스런 역사적 도시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진 : 청남대에 있는 박정희대통령 동상

사진 : 구미초등학교의 박정희대통령 동상



사진 : 구미 생가에 있는 박정희대통령 동상 제막식 때 박근혜대통령
태극기대한애국혁명의 동지들과 대한애국당 당원들과 조원진대표님과 함께 박근혜대통령을 모시고 정선에 박정희대통령 동상 건립 기념식을 하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사진 : 조원진대표님의 방훈화후보 유세 지원 중 시민에게 거수경례 모습과 방훈화후보 활동
동지들이여! 2일 남았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은사와 능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분투하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6.25동란은 1만년 한민족사와 대한민국 현대사에 최고의 영웅을 배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기적을 일으키며,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체제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압도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되는 영웅을 탄생시킨 전쟁이었습니다.
세계사적 천재이며 지도자이신 국부 이승만박사는 "인재" 발견, 양육, 배출만이 한민족의 살 길임을 일찍부터 깨달으시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위기상황에 오히려 탁월한 인재들을 발견해 내고 키웠습니다.
자기 자신도 구한말 세계 열강에 짓밟히고 결국 일본제국의 식민으로 전락하는 비극의 시대에 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인재로 키워져 독립운동을 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대한제국 개혁운동을 하다가
1900년 1월 9일 고종황제의 미움을 받아 극형(사형)을 받아야 하는 대역(반역)죄로 엮여(박근혜대통령을 탄핵으로 엮은 세력의 원조, 조병식대감 등) 서소문감옥에 갇혔습니다.
아펜젤러 등 배재학당에서부터 이승만청년을 키운 선교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구명운동을 하고, 모함으로 엮였기 때문에 무죄 방면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이승만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르고, 범털 개혁가 최정식과 개털 뇌물죄 서상대의 꾀임에 넘어가
1월 30일 총기를 휴대하고 탈출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또다시 구명활동을 하여 "대명률(大明律) 포망편(捕亡編) 죄인거포조(罪人拒捕條) 위종자률(爲從者律)에 의해 태 100에 징역종신형을 선고"받게 했습니다.
즉 대역죄는 면했으나 총기를 휴대하였지만 사용하지 않아 요즈음 용어로 "탈주 체포불응죄"를 적용하여 무기징역과 태형 100대만을 선고받게 한 것입니다. 무기형은 언제든지 사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태형을 맞지않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청년은 비로소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배재학당 채플에서 하셨던 설교를 기억해내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중생(거듭남)나게 됩니다.
사진 : 1900년 2월 22일 미국의 국부 죠지 워싱턴 생일을 맞이하여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청년이 회심을 했다는 소식들을 듣고 기뻐하며, 미국의 독립기념행사를 가지면서 미국 독립과 건국의 중요한 국부들(Founding Fathers)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죠지 워싱턴장군의 복장을 하신 아펜젤러선교사,
첫번째가 미국과 같은 국가 건국 비전을 심어주고 교육한 존스선교사,
왼쪽에서 첫번째가 이승만이 처음 만나 영어를 배우게 된 화학교사 노블선교사,
두번째가 국기(태극기)와 국가(애국가) 등의 개념을 가르쳐주신 벙커선교사.
이들은 이승만청년의 평생 스승이며, 독립운동을 도운 4명의 감리교 선교사들로 그들의 비전은 "이승만청년"을 아시아 최초로 미국과 같은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한반도의 국부 죠지 워싱턴과 같은 인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5년 8개월 동안 무기징역으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선교사들이 1904년 8월 9일 출옥시켜 고종황제의 특사와 유학으로 미국에 가게 했습니다.
사진 : 에비슨선교사(제중원, 세브란스병원 원장)가 출옥한 이승만을 마중하는 장면
이러한 체험이 있는 국부 이승만박사는 1948년 10월 숙군작업 때에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로 체포되어 즉결처분(총살형)을 받게 된 박정희소령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진 : 형 공산주의자 박상희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육사 교관 박정희대위를 남로당 군사부총책 이재복목사(종북좌파목사의 원조)가 유혹하여 남로당에 가입시켰습니다(육군사관학교 교관 때 모습).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당시 백선엽특부대장의 조사 보고서와 김정렬공군참모총장 등의 건의를 듣고,
아무런 혐의가 없지만 남로당에 가입한 고위직 장교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 "인재를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 살려야 한다"고 군법재판에 회부시켰습니다.
1949년 2월 군법재판소에서는 일단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10년형으로 감형한 후에 강제예편시켰지만 문관으로 정보처에서 다시 근무할 수 있도록 선처했습니다.
사진 : 군법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박정희소령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소장 결재 서류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이 일어나자 즉각 소령으로 다시 군무에 복직을 시켜
1950년 7월초 전투정보과장에 임명을 받자 박정희소령은 이 때부터 탁월한 군인능력을 발휘하여 날개를 단 거룡으로 부활을 시작합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6일부터 부산에 엄청난 최첨단 군수물자가 쏟아져들어오고, 이것을 서울까지 안전하게 수송하는 아주 중요한 군수수송업무가 생겼습니다.
사진 : 50년 9월 16일(토) 부산항에 쏟아져 들어오는 군수물자
군수 원조 물자 관리와 수송을 위해서는
1)청렴결백해야 합니다.
군수와 원조물자에 손을 대면 강력한 처벌을 하는 법령을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사진 : 50년 9월 16일 극형에 처한다는 국부 이승만박사의 특별 명령
2)각종 군수물자분류, 철도 도로 운송장비 등을 잘 활용해야 하는 고도의 수송작전이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장교가 필요했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와 UN군 사령관 맥아더원수에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문관으로 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북괴 남침 루트까지 예상하고, 복직하여 전투정보과장 역할을 잘 감당한 무엇보다 청령결백하다고 선후배들의 신임을 받는 "박정희소령"이었습니다.
박정희소령은 이 업무를 탁월하게 감당하여 국부 이승만박사와 맥아더원수의 총애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월 30일에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고, 2계급 특진하여 곧바로 대령으로 진급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1961년 5월16일 혁명을 성공하고,
국부 이승만박사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의 유지를 실천할 청렴결백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 박정희의장의 생일날 11월 14일에 케네디대통령의 국빈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맥아더원수를 정확히10년 만에 다시 기쁘게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 1961년 11월 18일(금) 뉴욕 아스토리아호텔 맥아더 숙소 방문
국부 이승만박사와 친형제지간과 같은 동생 맥아더원수가 키운 34세 소령 장교가 자랑스런 44세 육군 대장의 성공한 혁명지도자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하야하시게 되는 1960년 1월에 국부께서 대한민국에 많은 유산과 유지를 남기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부산에 최초로 군수기지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초대 사령관에 박정희소장을 임명한 것입니다.
이 요직을 수많은 고급 장성들이 각종 로비와 인맥 등을 동원하여 노리고 있었지만 국부 이승만박사의 눈에 박힌 인재는 10년 전에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군수물자수송을 탁월하게 감당하고, 자신이 1953년 12월 준장으로 진급시켜 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장군으로(Fort Sill, 미 포병학교) 미국 유학까지 시킨 박정희장군밖에 없었습니다.
20개 정예사단을 완비한 대한민국 강국 육군의 엄청난 군수물자와 원조물자의 관리와 수송 업무를 감당한 최고의 엘리트 장성은 오직 박정희소장이었습니다.
사진 : 1960년 국부 이승만박사의 마지막 재임 활동이 된 이 때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셨는데,
하나는 1월 16일(월) 원자력연구소 방문과 1월 20일(수) 박정희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임명 결재입니다.
사진 : 초대 군수기지사령관 임명
사진 : 중장진급 직전 재건회의의장으로서 박정희소장 공식 존영
사진 : 1961년 8월 10일(수) 중장 진급
케네디대통령의 국빈방문이 성사되자 대장으로 진급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사진 : 1961년 11월 4일(금) 윤보선대통령과 송요찬내각수반이 대장 계급장 달아주는 모습
사진 : 군인 박정희의 훈장 수훈 명단, 맨 처음이 바로 군수물자수송업무 지휘로 충무무공훈장
사진 : 박정희대령이 수여 받을 당시의 제3등급인 충무무공훈장과 약장
육군 대령에 특진한 군인 박정희는 같은 교사 출신 육영수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6년 후배인 장도영은 이미 준장으로 사단장이며,
자신의 동기이며 친구이면서 출생이 10일이 늦은 정일권은 육군중장 참모총장인데,
만일 비전이 없는 만년 소령이었다면 명가의 자녀 육영수와 결혼을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와 맥아더원수의 총애를 받는 이 때부터 박정희는 군인의 은사를 마음껏 펼치면서 탁월한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육영수와의 결혼은 찬란한 대한민국 역사가 도약하는 전환점과 분기점과 같습니다.
사진 : 12월 12일 결혼식
대령에 진급하는 박정희는 제9사단 참모장으로 발령을 받아 중공군의 개입으로 곤란에 처한 최전방에 투입이 됩니다.
사진 : 신혼살림 때 모습
1950년 2월 강릉 경포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리자마다 정선으로 이사하여 5월까지 근무하게 됩니다.
정선은 장래가 촉망되는 탁월하고 진정한 대한민국 국군 고급장교와 행복하고 안정된 한 가정의 가장으로 거듭나며,
1년 후 1952년 2월 2일 장녀 박근혜영애가 태어나 아버지가 될 준비한 역사적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대한애국당 정선군수 방훈화후보의 공약이 바로 이 자리에 "박정희대통령 동상"을 건립하여 정선을 자랑스런 역사적 도시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진 : 청남대에 있는 박정희대통령 동상
사진 : 구미초등학교의 박정희대통령 동상
사진 : 구미 생가에 있는 박정희대통령 동상 제막식 때 박근혜대통령
태극기대한애국혁명의 동지들과 대한애국당 당원들과 조원진대표님과 함께 박근혜대통령을 모시고 정선에 박정희대통령 동상 건립 기념식을 하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사진 : 조원진대표님의 방훈화후보 유세 지원 중 시민에게 거수경례 모습과 방훈화후보 활동
동지들이여! 2일 남았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은사와 능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분투하자!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