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라 민족과 나라 자체가 사라진다!

영국의 역사학자 Thomas Carlyle은 Hero Worship이라는 책에서

"역사는 진정한 영웅을 알아보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작은 영웅들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사진 1 :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역사의 고난 앞에서 손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꿇을 것인가?

역사를 위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포스터 : 이 포스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 글입니다.


해방 후 부터 시작된 좌우대립, 건국 후부터 시작된 체제대결,

결국 해방 때부터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중공의 지원을 받아 북한공산집단이 기습남침을 일으켜 대한민국은 국토와 기간산업, 산업시설 등 80%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진 2 : 모든 국력의 원천인 전력의 파괴가 가장 심각

인류 역사 상 최초로 UN을 동원시켜 UN의 헌장과 이념에 따라 UN이 선거를 주관하게 하여 대한민국을 건국시키고, UN 총회에서 국제법적으로 인준을 받게 한 국부 이승만박사는 또 다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한강기적을 준비하셨습니다.
사진 3 : 1948년 9월 UN총회 개회식, 3개월 동안 소련의 방해로 피를 말리다가 회의 마지막 12월 12일에 대한민국 건국 인준 통과
사진 4 : 소련의 방해 극심, 소련대표 비진스키가 조병옥박사에게 "이승만의 개"라고 폭언을 하자 동양의 호랑이라는 별명의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이런 일을 다 예상하시고, 조선의 호랑이라는 별명의 조병옥을 얌전한 장면대표와 함께 특별고문자격으로 참석시켰는데, 조병옥박사는 비진스키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야 임마! 너는 스탈린의 사냥개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발트 3개국을 공산화하면서 악행과 처형으로 악명을 날림). 이 말을 들은 미국의 덜레스외무장관 부인이 그 동안 비진스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조병옥박사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고 감사하다고 흐느끼셨습니다. 용장 밑에 약졸 없습니다.
사진 5 :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특사로 파견한 8인방의 건국 외교 공신들의 기념촬영 (앞줄 왼쪽부터 감리교인 모윤숙 감리교인 조병옥 가톨릭 장면(가톨릭국가 프랑스 등 외교를 위해) 감리교인 김활란, 뒤줄 감리교인 정일형 장로교인 김우평 감리교인 장기영 감리교인 김진구), 모두가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능통자와 외교에 탁월한 엘리트!
국부 이승만박사는 역시 UN을 동원하여 UNCURK, UNKRA 등과 같은 국제적인 경제지원단체를 조직케하 여 전후 복구 재건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습니다.
사진 6 : 1950년 10월 서울수복과 북진이 이루어지자마자 창설된 UNCURK(THE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PRISING ,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에서 국부 이승만박사와 호주대표 접견 사진 7 : 국부 이승만박사와 호주대표와 호주군 위문
사진 8 : 1951년 7월 26일 UNKRA(UN KOREA RECONSTRUCTION AGENCY, 유엔한국재건단) 개소식에서 국부 연설, 즉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곧바로 재건지원을 요청하여 하여 1년만에 성사됨. 휴전 후에 UN경제사찰단장 인도대표 Menon는 황폐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다시금 경제를 일으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진 9 : 1948년 UN 선거 감시단장으로도 활약했던 인도의 외교관 Krishna Menon.

이 말을 들은 세계사적 천재 국부 이승만박사는 인구만 많은 거지같은 인도인의 말에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하셨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는 당대에 자신과 같이 국제적으로 존경을 받는 서독의 아데나워수상이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고 "한강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백영훈청년을 선발하여 독일 부흥경제를 배우도록 유학을 보냈습니다.


사진 10,11 : 당대 서양의 거물은 서독 국부 아데나워수상(1896년생), 동양의 거물은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대통령이었습니다(1875년생 1년 형님). 두 분의 경륜 인격 지혜 용기 신앙 등이 거의 똑같지만 아데나워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지 않고(전쟁 후 건국)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국부 이승만박사는 전쟁을 겪고도(건국 후 전쟁) 한강기적을 이루웠기 때문에 역사적 능력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일단 친서양적인 타임즈는 국부를 늙고 추하게 그렸습니다. 그래도 사진의 의미는 대단합니다. 아데나워수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경제 군사 대국이라는 뿌리 속에서 부흥을 일으키기 시작했고(54년 표지), 국부 이승만박사는 뿌리도 약한 앙상한 가지에 태극기 하나로 생존에 허덕이는 상황입니다(53년 표지).
국부 이승만박사는 모든 것이 황폐한 상황이지만 자신과 같이 "우수한 인재"들이 많은 한국민의 인적 자원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효율적인 경제정책을 계획하고 실천했습니다.

당장 의식주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원조자금의 많은 부분은 인재개발 양성교육과 유학에 투자하셨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키운 인재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인물은 바로 최고 군인 엘리트 "박정희"청년이었습니다.

1953년 11월 17일 박정희대령의 생일 때에 준장 장군으로 진급을 시켜주시고,

1953년 12월 24일 성탄절에 200$ 한 달 생활비를 직접 손에 쥐어주면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명령하셨습니다.

"정희군! 이 돈은 피같은 돈이야! 국방은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 살려!"

1954년 1월 포병사령관 출신 박정희장군은 2살이 되는 영애 근혜양의 2번째 생일을 미치 치르지도 못하고 미국 포병학교 Fort Sill로 최초 유일한 장성급으로 정식 유학을 갔습니다(보통 장성들은 정치적 목적의 연수). 사진 12 : 1954년 1월 출발 하와이 경유,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클라호마로 기차를 타기 전에 잠시 관광 중 사진(이상국대령과 6.25 전우이며,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나온 월미도작전의 미해군 정보장교 M. J Luosey대령)

하지만 유학 가기 전까지 박정희장군을 시기 질투하는 선후배들의 방해가 극심했지만 청렴결백하고 철저한 임무수행능력에 전혀 하자가 될 사항이 없었습니다.

다만 남로당 전력은 이미 무효와 원상 회복되어 장군까지 진급했는데, 결국 이 전력을 가지고 모함하여 미군 8군 Maxwell Taylor사령관과 대사관에게 보고되어 중단 위기가 닥쳤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선발된 장교들이지만 막상 선진 강군 미군 각종 군사학교에서 유학 성적이 저조하여 유학프로그램이 무산될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 때 또 다시 박정희장군을 구명해 준 분이 바로 국부 이승만박사와 특무부대장(보안사, 기무사 전신) 김창룡준장이었습니다. 1948년 숙군작업 때 남로당 전력으로 사형 위기에서 구해주었는데,

2번째 또 다시 도와준 분이 국부 이승만박사와 이박사께서 아들과 같이 여긴 특무부대장 김창룡준장이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신원보증을 해 줄 수 있는 김창룡특무대장은(1920년생) "형님(1917년생) 같이 머리가 좋은 수재가 유학을 가서 1,2등을 해서 미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유학 프로그램이 중단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오히려 박정희장군에게 간절히 요청을 하여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박정희장군은 유학 중 탁월한 성적으로 미군을 감동시켰고, 이 때 모범적인 생활에 대한 보고가 5.16혁명을 성공하자마자 미국 케네디대통령으로부터 곧바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유학에서 돌아온 박정희준장을 제3군단 제5사단장에 임명을 했습니다.
사진 13 : 1955년 11월 3일(목) 인제 관대리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정일권육군참모총장, 송요찬 3군단장과 함께 예하 부대 방문 시 제5사단장 박정희준장과 악수하는 당시 대한뉴스 캡쳐 화면. 사진 14 : 국부 이승만박사 부대 사열 때 경례하는 박정희준장의 모습(가운데), 브리핑을 위해 유일하게 지휘봉 소지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경쟁자 조병옥박사가 유세 중 소천하여 88.7%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지만 고령의 대통령으로부터 승계서열 1위인 치열한 부통령 선거로 3.15 부정이 발생하여 소요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는 자신이 건국하고, 국민들에게 교육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인 선거 부정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으시고 "창피해서" 그리고 더 이상 청년들이 다치이 않도록 스스로 자진해서 하야하셨습니다.
사진 15 :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시위 중 부상을 당하여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대학생들을 문안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장하다, 청년들아! 불의를 보고 투쟁하지 않는 국민은 소망이 없어!"라고 위로하시는 모습. 77년 전 1898년 자신도 23세 청년으로 대한제국 개혁운동과 시위를 하다가 한성감옥에 갇혔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야로 인해 민주당이 내각제 개헌을 하고 정권을 잡자마자 극심한 정치보복 부정부패 각종 시위가 만연하고, 사법부까지 간섭하여 삼권분립의 위기가 닥쳤으며,
심지어 무엇보다 제2의 기습남침이 우려되는 적화통일 직전에 박정희소장은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남기신 유지에 따라 구국의 일념으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신념에 따라 5.16혁명을 성공시켰습니다.

사진 16 : 극심한 데모 중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대표적인 적화구호 등장 사진 17 :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 극좌공산주의 혁신계 단체의 야간횃불 시위(촛불시위 원조), 주제는 시위법과 보안법 철폐.
박정희의장은 혁명이 성공하고 20일만에 국부 이승만박사의 모교인 배재학당을 방문하셨습니다.사진 18,19 : 1961년 6월 7일 배재학교 체육대회 참석, 교장 장용하과 함께(이 때 남재준장군은 고등학교 2학년 중대장 생도로 연설을 들었고, 박영진동지가 중학생이었습니다). 박정희의장과 대통령은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계획하시고 추진하신 모든 효율적 경제발전사업을 실천하여 한강의 기적을 완성하셨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대통령이 독일에 차관을 얻기 위해 갔을 때에 모든 준비와 통역을 한 분이 바로 국부 이승만박사께서 이미 1956년에 독일에 유학을 보냈던 백영훈박사였습니다.
사진 20 : 박정희대통령이 일본에게 차관을 빌려라는 독일수상의 말에 "우리는 일본에게 맞고만 살았다(문경초등학교 교사 시절 일본인 관리들에게 몰매를 맞은 기억과 함께), 제발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백영훈박사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통역을 했고, 이야기를 들은 독일 에르하르트수상도 함께 울었으며, 전폭적인 지원이 성사되었습니다. 1965년 7월 19일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2,3개월 요양하시러 하와이에 가셨는데, 민주당이 입국을 방해하고, 1년 만에 5.16혁명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서 때를 기다리시다가 결국 고령에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박정희대통령이 모시고 싶어도 주치의가 항공기탑승을 불허하여 결국 하와이에서 소천하셨습니다.

소천 소식을 듣자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그 동안 정치활동금지를 해제하는 문서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셨습니다.
사진 : 정치금지해제 제안 이유(내용은 오랜 문서라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 있음) "이승만은 한일합방 이후 해외에 망명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으며 건국 후에는 초대로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12년에 걸쳐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초를 닦고 反共體制確立(반공체제확립)에 이바지 한 貢獻(공헌)이 지대하며, 5.16혁명 후에는 ()聖漢城에서(하와이 요양을 의미하는 것 같음) 病床(병상)에 누어 呼吸(호흡)하면서도 우리나라의 發展(발전)革命課業修行(혁명과업수행)精神的(정신적)鼓舞(고무)를 하는 等(등) 貢跡(공적)多大(다대)함으로 因(인)."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그 동안 하와이 병상에서도 TV로 온 국민이 열심히 참여하는 건설사업을 시청하시면서 박정희의장과 대통령이 수행하는 한강기적을 위한 경제발전노력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고 박수를 치시면서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께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이 아들과 같이 여기는 밴플리트장군(한미우호재단설립)을 통해서 박정희대통령의 모든 사업을 적극 도와주도록 했습니다. 사진 21 : 미8군 사령관은 밴플리트대장은 1951년 9월 3일 연천에서 제9사단 재 창설식 때에 사단장 장도영준장과 참모장 박정희대령을 국부 이승만박사와 함께 처음 만났습니다. 참모장 박정희대령이(뒷모습) 국부와 밴플리트앞에서 브리핑하는 장면.
사진 22 : 이후 국부는 물론 밴플리트도 박정희를 최고 엘리트 포병사령관으로 키우면서 차세대 지도자로 전폭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밴플리트장군과 박정희장군, 박정희의장, 박정희대통령과 계속적인 유대를 가진 증거가 되는 사진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5.16혁명을 미국에서 맨 먼저 지지하고, 케네디대통령과의 국빈초청 외교활동을 한 증거로 박정희의장이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만난 모습니다(1961년 11월 15일 맨 왼쪽).

사진 23,24 : 1971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당한 박정희각하(54세)와 밴플리트장군(79세)와 다소곳한 밴플리트장군의 겸손함과 온유함.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와 함께 피와 땀과 눈물로 헌신한 작은 영웅들이 쓴 것입니다. 쓰레기통에서 전 세계를 향해 향기가 가득한 장미꽃이 만발할 수 있던 것은 누군가의 극심한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씨를 뿌려고, 누군가 가시에 손발이 찔리면서도 정성을 다해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종북주사파 문죄인자파독재정권은 위대한 역사를 지속적 조직적으로 조작 폄하 왜곡을 하다못해 이제는 심지어 지우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습니다.

투쟁하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라 만주족과 청나라처럼 민족과 국가 자체가 영원히 사라집니다. 포스터 : 프랑스 마크롱대통령은 대독일항쟁 드골연설 78주년 기념식에 참석을 하다가 예의없는 학생을 차분하게 타일렀습니다. "혁명을 하려면 먼저 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 대학생 때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시위만 하고,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보상금만 쏠랑쏠람 빼먹은 주사파정권이 촛불난동으로 권력을 찬탈하여 1년 만에 국가부도를 내고 있고, 감히 역사까지도 지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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