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까불지마라!

대남공작에 의해서 조직적 조작적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대한민국 정체성 정통성 파괴를 위한 역사왜곡!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정통성이 없는 소련의 꼭두각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만든 조직적 조작적 지속적 가짜뉴스의 시작이 친일파와 반미제(미제국주의식민지 해방)라는 역사적 용어였습니다.

적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대한민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은 친일파정부이며, 미제국주의식민지로부터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거짓 역사용어입니다.

전쟁은 상대방에 대해 "증오심, 극한 분노심, 적개심"이 없으면 일으킬 수 없습니다.

어그제 까지 형제자매와 동지로 화기애애하게 살던 한민족이 둘로 나뉘어 하루 아침에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증오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적화통일을 위해서 전쟁의 명분으로 만들어내 용어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등용한 반민족적 정부이며,

미제국주의식민지(일본제국식민지에 대한 반감)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미제국주의 꼭두각시인 이승만정부를 타도하고 남조선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정권수립의 이념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 적화전쟁 명분, 증오 분노 세뇌 친일 미제 해방 포스터, 북괴정권수립 때부터 전쟁 준비와 인민군창설 때부터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사진 : 1948년 10월 25일 침략준비 공군창설식, 왼쪽 이활장군(나고야항공대 출신 조종사 중좌(중령)출신으로 최고위직 중 한 명, 만일 대한민국으로 왔으면 당연 골수 친일파 매도! 그 뒤 카미가제 등 일본 조종사 출신 장교들로서 당대 최고 엘리트집단! 사진 : 33세 애숭이 똘마니 가짜 김일성은 덧니 등 성형으로 얼굴 개조! 그러므로 그리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 구구 호국에 관련된 인물들은 일제시대에 태어나기만했어도(친일파 아들) 모두 무조건 친일파로 갔다부쳐 매도하는 것입니다.

반면 골수 친일파라도 북한정권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자들은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둔갑합니다(대표적 여운형 혹은 월북자들).

해방 후 남북한 모두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습니다.

태극기는 삼일운동을 상징하는 깃발이기 때문에 북한정권 지도부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계속 소련기와 함께 사용했습니다.

공산주의자이이지만 민족주의자인 김두봉(주시경 제자로 영화 "말모이"에 등장)도 소련의 태극기 제거 압박에 극렬히 반대하다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로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합법적 정부수립이 되어 가자

7월 6일에 소련 스탈린의 강요에 의해서 모스크바에서 전화로 불러둔대로 그린 인공기로 교체했습니다. 사진 : 태극기 내리고 인공기 게양하는 교체식 머리 벗어진 이 김두봉, 오른쪽에는 종주국 소련기가 있다(국기게양 설치 등도 국제의전이 있습니다. 행진 때 무분별하게 태극기를 드는데, 맨 오른쪽 태극기 그 옆 왼쪽 성조기, 앞이 태극기 뒤가 성조기 그 다음이 다음이 구호기 등 배치 행진).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금지물이 된 태극기는 몰래 숨길 수 있었고, 박정희선생님처럼 땅바닥에 그림으로 그렸다 지우면서 비밀 교육이 가능했지만 금지곡이 된 애국가는 소리내어 부를 수 없어서 점점 잊혀져갔습니다.

안익태선생은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석했다가 마라톤선수로 출전한 손기성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자신의 만든 코리아 환타지 중에서 한 테마를 애국가 가사와 결합혀 응원가로 만들었습니다.

올림픽이 끝나자 LA한인교회와 워싱턴 DC의 이승만박사에게 전달했으며, 그 때부터 이승만박사께서 주도하시는 독립운동 미국한인단체와 교회에서 불려졌습니다. 1942년 2월 녹음한 유명한 VOA 이승만박사의 대국민 한반도 비밀 연설 부분 마지막에서 최초 공식적으로 이 애국가를 사용했습니다. LA한인교회 성악가와 찬양대 협조로 삽입. 아래 영어영상(그 동안 한국어만 알려졌는데, 영어본 찾음). https://www.youtube.com/watch?v=uQGQGgz2ELk&t=37s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박사께서 귀국하시지마 10월 27일 제26회 조선전국종합경기대회에서 이승만박사와 태극기 기수였던 손기정선수와 서울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최초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사진 : 손기정 기수가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는 장면(해방 초기 미군정 하에서 아직 독립 건국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일장기가 그대로 있는데, 대부분 이 사진에서 일장기를 제거하고 사용)
사진 : 대한체육회 100년 역사 기록에 제거한 사진 사용

이승만박사는 개회사에서 "이제 너희들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마음껏 세계를 향해 도전하라!" 연설하셨는데, 이 연설을 듣고 신윤복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 우승합니다. 사진 :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메인 스타디움이 들어서자 관중석에서 안익태가 박수를 치면서 군가와 응원가식으로 빠르게 애국가를 최초로 불러주었습니다. 안익태와 동료들이 불러주는 응원 애국가를 들으면 이를 악물고 힘차게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장면(글 쓰면서 눈물나네요!)


북괴와 남로당 종북좌파세력은 국민들을 한순간에 결집시키는 노래의 위력, 애국가의 영향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애국가의 작사자인 윤치호장로를 최초로 친일파로 조직적 조작적 지속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매도를 당하여 충격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얻었는데, 윤치호장로는 죽기 전에 그 동안 조카 윤치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어 후원했던 후배 동지 이승만박사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세째 딸 윤문희와 친구인 김활란박사가 함께 있을 때에 애국가 필사본을 유물로 남겨주시면서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으니 내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국민들이 애국가를 안 부를 수 있으니 당분간 비밀로 하라!"

그래서 이 때부터 생긴 역사적 공백에 "안창호작사설, 최병헌작사설, 김구작사설 등등" 애국가 작사 논란이 생기 것입니다. 사진 : 필사본 중 하나.
지인인 김동J 역사학자가 보스턴 유학 시절 미국에 이민하여 내쉬빌에 사는 윤문희가 찾아와 필사본를 전해주려고 했는데, 이 분이 그 가치를 모르고 거절를 했습니다(무지는 불행이다!).
드디어 한겨레신문이 본격적인 애국가 시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루 전에 엠병신(MBC)이 떡밥을 던져놓았습니다.

국부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작곡한 "조국찬가"의 주인공 김동진(평양에서 공산당 박해를 피해 월남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이 작곡한 군가 육군가를

삼일운동, 무장항일운동, 광복군 등과 교묘하게 연결해서 친일파가 작곡한 군가라고 논란을 일으키고 먼저 쓸쩍 시비를 걸어놓은 것입니다.

즉 저들은 철저히 대남공작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115692_24634.html?menuid=nwdesk 그 동안 "더 이상 그 입을 다물라"라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더 이상 까불지 마라!" 종북좌파정권에게 엮이면 동족전범자와 반인륜 범죄자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시비는 모든 집회 행사 때마다 1-4절까지 목놓아 부르는 대한애국당과 태극기대한애국혁명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우리는 더욱 삼겹 줄로 뭉쳐 전열을 가듬어야 합니다.

안익태 친일파 매도는 국부와 박정희각하, 박근혜대통령 가짜뉴스 탄핵내란의 일련의 지속적 조직적 조작적 역사 왜곡의 진행입니다. 1906년 평양에서 출생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어려부터 음악 신동으로 E.M Mowry박사 등 교사들이 키운 천재 음악가입니다.
1919년 숭실중학교 학생 당시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퇴교를 당한 기독교 민족주의 엘리트 학생출신입니다. 사진 : 1955년 3월 26일 국부 이승만박사 생신 80주년 기념 경무대 방문, 대한민국 최초 1호 문화훈장 수여하시고, 축하행사로 코리아환타지와 애국가를 지휘하시는 모습. .

사진 : 1960년 3월 26일 국부 이승만박사 제85회 생신 때 방문 코리아환타지와 애국가 지휘. 경복궁 야외연주와 실내연주. 이후 4.19의거로 하야하심 즉 이기붕부통령 최인규내무의 3.15부정선거 외에는 정상적인 국정운영!

사진 : 1962년 5월 16일 혁명 제2주년 기념행사에서 코리아 판타지와 애국가를 지휘하시는 안익태선생과 지휘봉을 박정희의장에게 선물하시는 모습.







박정희청년은 해방 후 북경 광복군 중대장으로 있다가 늦게 귀국. 1946년 9월 29세에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 생도대장 이치업대위가 생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싶은데 자신도 잘 몰라서 2기생에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애국가 1-4절까지 다 기록한 유일한 생도가 박정희청년으로서 이 때부터 생도들이 애국가를 부름.
사진 : 조선경비사관학교와 생도 시절 박정희청년
대한애국당의 태극기대한애국혁명은 대한민국 정통성 정체성 회복 수호 계승입니다. 더 이상 까불다가 전범 반인륜범죄 가담으로 크게 다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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